흔들리는 이야기는 색덩어리가 된다
박지형 (독립 큐레이터)

<Grab the slush>
송승은 개인전
2020.04.04 – 04.18  Keep in touch Seoul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식사 자리.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표정은 흐릿하고 한 인물은 여러 화면 위에서 어디론가 움직인다. ‘누가 내 잔에 독을 탔을까?’. 이 하나의 의혹으로 전시는 시작된다. 송승은은 거짓이 없는 솔직한 세계를 상상하지만 결코 이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안다. 그는 일상에서 맺는 여러 관계속에서 느끼는 이질적인 감정들의 충돌을 다룬다. 한 인물에게서 동시에 느끼는 친숙함과 거리감, 사람간의 솔직함과 거짓, 눈치보기, 경계하기 등 감정의 민낯이 보여주는 울긋불긋한 요철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모호한 대상은 주로 가상의 상황이나 인물을 통해 형상화된다. 그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는 짧은 문장이나 상상 속 장면을 염두에 두고 이로부터 자신의 조형 언어를 풀어나간다. 이번 전시에는 누군가 자신의 잔에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불러올 경계, 긴장감, 두려움, 불안함과 같은 심리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최근작에서 특기할만 한 것은 초반에 제시한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이 이미지의 형식안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다. 혹은 다루고자하는 소재의 가변적인 속성이 물리적 표현의 방식으로 전이되어가는 중간적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특정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에 치중하기보다 이로부터 조형적 실험을 펼쳐 나가려는 목적이 강하다. 이를 위해 그는 작업 초기 단계에 명화나 고전 만화, 영화 등의 레퍼런스를 가지고 콜라주 형식의 드로잉을 제작하는데, 이는 머릿 속에 담아둔 추상적 감정의 단상에 가시적 뼈대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2 차원과 3 차원 사이의 이미지 파편들은 얼기설기 뒤섞이며 작가에게 우연적 형상을 제시한다. 이후 콜라주는 캔버스 위에서 다시 한 번 재구성되는데,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종이 조각들은 붓자국들로 치환되며 서서히 회화적 환영성을 구축해간다.

그러나 이 환영성은 의도적으로 완벽히 성취되지 못한다/않는다. 예를 들어 <Dining Room>(2020)에서 강조되는 색면들의 연결과 잘라 붙인듯한 사물들의 배치는 화면 속 깊이와 사건의 전개를 상상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테이블보와 바닥 타일, 커튼을 표현하는 붓질들 사이에서 인물들은 그림의 주제가 아닌 배경마냥 평평해져 있다. 때문에 인물들 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되돌아가지도 못한 지점에서 둥둥 떠다닌다. 관객들은 그저 색채와 스트로크가 만들어내는 모호한 분위기와 어떤 일이 도래할 것만 같은 느낌, 동시에 인물이나 사물이 눈앞에서 흘러내리기(slush) 직전의 상태를 감지할 뿐이다. 그러니 사실 작가가 전제로 했던 이야기라는 것은 그의 회화 속에 존재하기도, 부재하기도 한다. 한편 연속되는 세 폭의 <Mary Jane>(2020)에서는 그의 매체적 시도가 더욱 부각된다. 우리는 우선 여러 ‘메리 제인’을 떠올려볼 수 있다 - 오래된 만화의 주인공일수도, 누군가 신고있던 구두일 수도 있다. 그 중 무엇이든 이 그림의 단서가 될 수 있지만, 거꾸로 어떤 추측도 완벽한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한 인물의 형체는 완결되기 이전에 계속해서 물감의 흔적 속으로 뒤섞여버린다.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한 세 그림은 우연적인 효과들을 수렴하면서 점진적으로 다른 이미지가 되어간다.

송승은은 프레임에 설정해 둔 빛과 공간을 가시화하고 특정한 형상을 붙들고자(grab) 하지만, 동시에 붓끝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창출하는 새로운 형상을 끌어안는다. 따라서 관람자는 명확한 결말 대신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조형적 풍경 사이에 남겨진 인물의 그림자 혹은 움직임이었을 색덩어리들과 계속해서 충돌한다. 그러나 그가 반복적인 대상을 다룸으로써 추상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상이냐 추상이냐 혹은 이야기의 결말이 어디로 향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며, 어떻게 화면의 자의적 균형을 찾으면서도 일렁이는 감정의 진폭을 증식시켜나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송승은의 회화는 언제나 두 물음표를 향해 간다. 개인과 타인의 관계항에서 발현되는 여러 심리적 간극, 그리고 회화라는 매체가 시각적 환영을 구축하면서도 완결되지 않는 물리적 조건으로서 존립하는 방식. 그 사이에서 현실의 유의미한 감각을 짚어내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